읽을수 있는 세계

“희생”이라는 단어

김남시 2010. 4. 29. 19:25

 

어제 아침엔 학교에도 플랭카드가 붙었다. “천안함 희생 장병들의 명복을 빕니다.” 재향군인회나 파출소 등의 공공건물은 말할 것도 없고, 선거를 앞둔 각 정당 사무소들도 이에 대해 추모의 입장을 밝히지 않으면 낙선이라도 할 것처럼 경쟁적으로 천안함 관련 플랭카드들을 내다 걸었다. 오늘 약속이 있어 다녀온 코엑스 건물 앞에도 “천안함 희생 영웅들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플랭카드가 붙은 걸 볼 수 있었다. 나는 천안함에서 목숨을 잃은 장병들이 왜 ‘영웅’이냐라는 질문(이에대한 별로 마음에 들지않는 비판적 입장은 4월 29일자 한겨레 신문 곽병찬 컬럼이 내놓았다)에 대한 내 의견을 덧붙이려는 것이 아니다. 나의 관심은 이들을 기꺼이 영웅이라 부르는 사람이나 거기에 비판적인 사람이나 공히 사용하고 있는 단어 “희생”에 있다.

 

<민중 엣센스 영한사전>의 ‘sacrifice' 라는 항목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어있다.

1. 희생, 산 제물, 제물. 2. 희생적인 행위, 헌신...3. 속죄의 기도, 회오. 4. 투매, 투매로 인한 손실. vt. 1. 희생하다. 제물로 바치다. 단념(포기)하다. ∼ oneself for one's country 조국을 위해(서) 몸을 바치다. 2. 투매하다. 헐값에 팔다. 3. (주자를) 희생타로 진루시키다. vi. 1. 산 제물을 바치다. ∼ to God. 신에게 산 제물을 바치다. 2. 희생타를 치다. [민중 엣센스 영한사전]

 

이 단어가 가진 의미를 좀더 명확히 확인하려고 수중에 있던 Webster 영영사전의 같은 항목을 찾아 보았다.

1. the act of offering the life of a person or animal, or some object, in propitation of or homage to a deity. 2. the act of giving up, destroying, permitting injury to, or forgoing something valued for the sake of something having a more pressing claim. 3. a selling or giving up of something at less than its supposed value. [Websters New World Dictionary]

 

이 두 사전 - 영한사전/영영사전 - 에 나와있는 희생/sacrifice 라는 단어의 의미는 거의 일치한다. 이 사전들은 희생을 신, 국가, 아니면 (야구)팀 (‘희생타’!)과 같이 자신보다 더 큰/가치있는/위대한 - “something having a more pressing claim” - 존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이나 제물을 바치는/포기하는 행위라고 정의하고 있다.

 

내가 사는 동네 한나라당 선거 사무소 건물에 걸려있는 플랭카드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 있었다.

 

“나라 위해 목숨바친 천안함 순국장병들을 머리 숙여 깊이 애도합니다.”

 

여기에는 ‘희생’이라는 단어가 직접 쓰이지는 않았지만 위에서 확인한 그 의미들은 다른 단어들 - ‘나라 위해 목숨바친’, ‘순국장병’ - 을 통해 훨씬 분명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이 문장 속에서 천안함에서 목숨을 잃은 장병들은 ‘자신보다 더 큰/가치있는/위대한’ 나라 - 그런데 왜 ‘국가’, ‘조국’ 혹은 ‘대한민국’이 아닌 ‘나라’라고 했을까? 한‘나라’당을 고려한 선거전략? - 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인물들로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희생’은 예를들어 슬라보예프 지젝이『전체주의가 어땟다구?』에서 ‘희생의 유혹’에 대해 말할 때의 의미에도 잘 들어맞는다. 지젝은 여기서 홀로코스트를 히틀러의 본능적 증오심 혹은 그의 확신, 아니면 어떤 다른 정치적 목적 등의 근거로 설명하려는 시도들, 한마디로 "히틀러의 마음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나(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나)?"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숨겨진 의미를 필사적으로 찾아 헤매는 시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젝에 의하면 그것은 우리가 홀로코스트 같은 거대한 사건이 "화면에서 장면이 설명없이 전환되는 블라인드 효과처럼 일어날 수도 있었다는 것"을, 그것이 어떤 ‘맹목적인 우연’에 의해 일어났다는 것을, 그처럼 엄청난 윤리적 재앙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일어날 수도 있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정도 규모의 엄청난 사건에는 분명 어떤 ‘의미’가 있어야만 한다고 여기며, 거기에서 "아무 것도 찾아낼 수 없으리라는 데" 대한 심각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지젝은 이것이 "라캉이 희생의 유혹이라고 불렀던 것에 너무나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재난과 같은 끔찍한 결과 혹은 누군가의 폭력적 죽음을 다만 맹목적 우연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는 그런 죽음을 어떤 무엇인가를 위한 초월적 간청으로, 어떤 식으로든 의미있는 응답을 기대할 수 있는 제의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싶어하며, 그래서 그 죽음에 ”희생“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희생의 제스쳐"는 그를통해 "희생이라는 우리의 간청에 화답할 수 있는 (혹은 그러지 않을 수 있는) 어떤 타자가 저 바깥에 있음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그들에게 올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기다림으로써 그들에게 올 누군가가 있다고 믿는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인공들 처럼, 누군가의 죽음을 ‘희생’이라 부르면서 우리는 그 죽음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무화되지 않도록 거기에 반응(해야)할 ‘자신보다 더 큰/가치있는/위대한’ 존재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희생’이라는 단어에는 이와는 다른 보다 중립적 의미도 있다. 그 단어는 예를들어 우리가 “아이티 지진 희생자 최소 25만명” 혹은 “중국 전역서 칭하이 지진 희생자 애도” 라고 말할 때 사용된다. 여기 사용된 ‘희생’ 혹은 ‘희생자’라는 단어는 “자신보다 더 큰/가치있는/위대한 존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이나 제물을 바치는/포기하는 행위”가 아니라 다만 “피해자” 혹은 “사망자/사상자”라는 의미만을 갖는다. 이는 국어사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뉴 에이스 국어사전>의 ‘희생자’라는 항목에는 “1.희생을 당한 사람. 2. 어떤 일로 인하여 죽은 사람. 또는, 피해를 입은 사람”이라고 나와있으며, <동아 새 국어 사전>의 ‘희생’ 항목은 “1. 신명에게 바치는 산짐승. 2. 뜻밖의 재난 따위로 헛되이 목숨을 잃음. 3. (남이나 어떤 일을 위하여) 제 몸이나 재물 따위 귀중한 것을 바침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국어 사전의 이러한 정의를 읽고 또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이 단어의 용례들을 고려해 본다면 여기서 두 번째 의미로 사용되는 ‘희생’이라는 단어에는 지젝이 말했던 ‘희생의 제스쳐’가 담겨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어단어 "sacrifice"에는 ‘희생의 제스쳐’가 없는 ‘희생’의 이러한 의미가 없다!) 여기서 “희생자”라는 단어는 “사망자“ 혹은 ”사상자“라는 단어의 무례함 혹은 무거움을 완화시켜 주는 표현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천안함 희생 장병들의 명복을 빕니다”는 플랭카드의 ‘천안함 희생 장병’이라는 단어는 ‘희생’이라는 단어가 지닌 이 두가지 의미로 인해 서로 다른, 어쩌면 서로 대립적인 의미연관을 발생시킨다. 이들의 죽음을 ‘국가’ 혹은 ‘민족’이라는 ‘더 크고/가치있고/위대한’ 타자에 의거해 의미화하려는 것이 그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천안함 사고로 인해 목숨을 잃은 장병들’을 중립적으로 지시하려는 것이다. 이 중 어떤 의미연관이 이 사회에서 주도적이고 지배적으로 등장할지는 이 사건을 둘러싼 담론적 역관계가 결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