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해제를 쓴 쟝 아메리의 책이 나왔다. 자살을 종교적, 도덕적 논의 - 주로는 비난 - 의 대상에서 구제해 본격적인
철학적 토론의 대상으로 삼기에 쟝 아메리의 이 글 만큼 적당한 책은 없을 것이다.
옮긴이 - 김희상 - 는 전문 번역가 답게 쉽지 않은 아메리의 글을 그의 글 특유의 분위기를 놀랍도록 잘 살린
한국어로 번역해 놓았다. 다만 한국어판 제목이 독일어 원문의 제목과 다르다. 독일어 원본의 제목은
Hand an sich legen. Diskurs über den Freitod 이다. 첫번째 문장을 말 그대로 번역하자면
'자기 자신에게 손을 대다'라는 뜻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의 에두른 표현이다.
이 제목에는 우리의 생명과 삶은 온전히 우리 자신의 손 "Hand" 에 주어져야 한다는, 신도 사회도 결코
우리의 삶/생명에 대한 채권자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아메리의 핵심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독일어 판의 이 제목이 이 책의 주장이 갖는 도발적 성격을 조심스럽게 고려해 지어진 것이라면,
한국어 판본의 제목은 이 책의 성격을 있는 그대로 폭로한다. '자유 죽음'...
(그런데 표지의 권총 그림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탐정 소설이나 범죄물 등을 연상시킨다.
아메리의 진지한 자유 죽음에 대한 성찰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
한국어 번역자는 "Hand an sich legen"을 "손을 내려놓는다"라고 옮겼다. 그가 이 문장을 어울리는 한국어로
옮기느라 꽤나 고심을 했을 것이라는게 느껴진다. 그런데, "손을 내려놓다"는 한국어 문장에는 무언가 하던 일을 조용히
중단한다는, 혹은 손을 통한 어떤 활동 Hand-lung 에서부터 '물러선다'고 하는 수동적 의미가 강하다. 하지만 독일어 원문의
타동사 legen 은 그와는 반대로 자신의 삶/생명에 대한 '적극적 개입'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자살/자유죽음이란 오늘날 모든 것을 테마와시키는 사회에서는 '선정적' 테마이기도 하다. 이런 테마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그래서
쉽지 않다. 그건 손쉬운 Polemik 에 빠져들거나 소위 '자살방지 캠페인' 과 같은 사회정책들과 충돌한다.
이 책을 계기로 한국에서도 자살에 대한, 과장된 호들갑이나 근엄한 도덕주의적 비난을 넘어서는, 진지한 철학적 논의가
이루어 질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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