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수 있는 세계

발터 벤야민, 모스크바 일기 서평

김남시 2009. 10. 18. 11:55

내가 번역한 <모스크바 일기>에 대해 철학자 김영민 선생이 썼던 멋진 서평을 이제서야! 발견하였다. 

2007년 4월 20일 한겨레 신문에 실렸던 글을 이렇게 뒤늦게야 여기 옮겨 놓는다.

 

[동무와연인] , 키스는 혁명보다 어려워라. 발터 벤야민 아샤 라시스

나는 벤야민(사진) 정부(情婦)였던 아샤 라시스(Asja Lacis) 의도와 태도, 그리고 특히 그에 관한 회고를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애인은 애인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는다는 만고의 상식만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그녀는 단지 명의 애인으로 살아갈 있기에는 너무나 야심만만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눈빛에서부터 어투에 이르기까지 요부(妖婦)로서의 재능이 충만했지만, 불행/다행하게도 동거하는 남자가 있었을 아니라 스스로를 혁명가로 생각하고 있었다. 벤야민이 결코 기민하지 못한 동작으로 다소간 어눌하고 소심스럽게 키스해 것을 요청할라치면 라시스는 고양이같은 눈동자를 장난스럽게 번쩍거리면서 그를 피했고, 애매하고 유약하다고 판단한 그의 형이상학을 들어 번번이 닦아세웠다: “그런데 문화의 대가라는 너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동생은 공산당에 가입했는데 너는 하지 않는 거야?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1926~27) 통독한 뒤에 남았던 가장 분명한 인상은 그가 안경 너머의 심원하고 예리한 눈빛이 시사하는 것보다 훨씬 뚱뚱하며 굼뜨게 움직일 아니라 멈칫거리길 잘하는 성격이라는 느낌이었다. 그의 죽마고우 게르숌 숄렘(Gershom Scholem) 전언에 의하면, 정신적 총기에 비해 벤야민은 육체적으로 강인하거나 유연하지 못했으며 특히 여자들에게 성적으로 매력적인 타입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이다. 가령, 벤야민은 다소 기이할 정도로 ‘입을 제대로 맞추질’ 못한다: “그녀가 방에 들어왔을 그녀에게 키스하려 했지만, 그랬듯이 실패했다. 그는 심지어 키스해주기를 간청하기조차 하지만 여지없이 거절당하곤 한다. 벤야민은 날랜 흑표범 그것처럼 번득거리는 라시스의 입술과 살을 소유하려는 일념에서 달이 못되는 모스크바 체류 중에 쉼없이 선물공세를 퍼붓는다: , 과자, 케이크, 실크 블라우스, 인형 등을 일상적으로 갖다 바치는 이외에도 ‘평생 간직할 만한 선물’을 실없이 약속하곤 한다.

섹스에서 혁명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그들의 욕망 사이로 (라시스) 선물(벤야민) 엇갈린 교환만이 연인의 전유할 있는 유일한 현실이었다. 그녀는 기민한 동작과 말로써 벤야민의 서투른 구애를 매번 꺾어 놓았고, 벤야민은 발정(發情) 정서적 허무주의 사이를 절망적으로 왕래하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만년필로 마치 자신의 허벅지를 찍듯이 당시의 심정과 풍경을 일기 속에 묵묵히 기록할 뿐이었다.

책의 장정, 글씨, 그리고 종이에 열광했던 글쓰기의 천재는 명백히 대화에서는 실패하고 있었다. 물론 워낙 말이 통하지 않는 관계가 연인이며, 살이 통할 있도록 말의 소통을 무기한 연기할 있는 연인이긴 하다. 벤야민이 알았던 가장 뛰어난 여성이며 급진적 공산주의의 현실성을 깊이 통찰하고 있었고 그의 유대 신비주의에 정치현실적 변혁의 맹아를 심어주었다고 평가되는 라시스! 그러나 만의 사적 공간 속에서의 그녀는 무엇보다도 ‘말이 빠른 살’이었다; 그리고 벤야민은 무엇보다도 살을 설득하거나 포획할 없는 어눌한 말이거나 선물이었다: “우습게도 너무나 단순한 이야기를 번째로 듣고서야 이해했다. 이런 일이 내겐 자주 일어난다. 너무나 집중해서 그녀를 바라보느라 그녀가 말하는 것은 거의 듣지 않고 있는 것이다.

흑표범은 곰에게 말을 걸지만 곰은 다만 흑표범의 살을 뿐이라는 사실, 어긋남의 변증법으로써 통속의 사랑은 되레 회생한다. 사실 어긋남의 자가발전은 역사철학에까지 이른다. ‘반사회성의 사회성’이라는 칸트적 역사철학이나 ‘인정투쟁’이라는 헤겔적 역사철학도 결국 어긋남의 편차에 의탁한 자가발전의 윤동(輪動) 다름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은 오인(어긋남) 근거한다’는 정신분석적 명제는 모든 위대한 소설이 반복해서 확인시켜주는 낡디 낡은 이치다. 플로베르, 혹은 바르트(R. Barthes) 말처럼, 연인 사이의 열정의 핵심은 심리적 편차와 어긋남에서 쉼없이 생성되는 물매 효과인 것이다.

벤야민은 쉼없이 선물을 갖다 바치면서 키스를 욕망하지만, 라시스는 호나우딩요처럼 잽싸게 움직이면서 (입술이 아닌) 말로써 야무지게 공박한다. 밀란 쿤데라는 <농담>(1968) 속의 연인, 루드빅과 루치에의 경우를 통해 동일한 어긋남을 예시한다: “우리가 만날 때에는 언제나 꽃이 기다리고 있었으며, 나는 마침내 이에 익숙하게 되었다. …이런 식의 선물에 루치에가 굉장히 집착하고 있었다. 이는 아마도 그녀가 늘상 화술의 부족으로 시달림을 받아왔으며, 이에 따라 속에서 일종의 언어형태를 발견하였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살과 말의 욕망은 어긋난다. 물론 연정은 어긋남의 역설적 생산성(변증법) 먹고 영생한다. 그리고 어긋남의 자리에서 선물은 안타깝고 쑥스럽게 기동한다. 데이비스(N.Z. Davis) 등의 보고처럼, 선물은 원시경제이면서 한편 자본제적 교환에 대항해서 의식적으로 번성하기도 한다. 그러나 선물은 자본주의를 견제할 수도 없으며, 말과 사이의 갭을 메우지도 못한다. 물론 사랑은 선물의 실패를 통해서 다시 부활한다.

김영민/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