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스크랩] 작가들이 바라본 촛불집회

김남시 2008. 6. 13. 14:54

작가는 독특한 자기세계를 현실세계에 투사하여 거기서 나오는 빛을 독자들에게 비춰주는 사람들이다. 때문에 동일한 현상을 바라보면서도 독특한 인상을 남긴다. 아고라에서 한 블로거는 "물리력보다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이다"라고 말했다. 작가들이 보여준 거리의 상상력으로 촛불과 함께 한껏 타올랐던 분노를 눅여두는 것도 좋겠다. 더욱 높고 크게 타올라야 하므로... 작가군은 편의상 두 개로 구분했다. 촛불문화제 거리를 누비며 르포를 매체에 송고한 '현장파'와 현장은 아니지만 촛불문화제에 깊은 관심을 보인 '관전파'이다. 그들이 언급한 내용에 따라 재구성했다. - 多作 주


<현장파 작가들>


이문재 시인은 6월5일 72시간 릴레이 집회를 체험하고 <시사IN> 제39호에 르포를 게재했다. 그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키워드로 집회를 해석하였다.


소설가 김연수는 경찰의 과잉진압 논란이 빚어지던 5월31일 현장에서 본 것을 한겨레신문 6월2일자에 게재하였다. 그날의 따뜻한 햇살과 물대포의 차가운 공포가 교착된 문체가 어지러웠지만, 5월의 햇살은 끝났다는 의미심장한 상징으로 6월의 전운을 암시했다.


신현림 시인은 5월29일 밤 종로에서 거리행진을 하는 군중들 속에서 본 것을 6월2일자 경향신문에 게재했다. 인간적이고 살갑고 질박한 생명의 온기를 느꼈다고 기록했다.


소설가 방현석(왼쪽)과 김남일(오른쪽)은 6월 9일부터 경향신문에 <한국작가회의 '촛불 집회' 릴레이기고>에 각각 현장르포를 기고했다. 방현석은 '상상력', 김남일은 '동지'로 촛불집회를 바라봤다.


<관전파 작가들>


이문열이 돌아왔다. 진나라 멸망 이후 유방과 항우의 결전을 다룬 '초한지'(민음사) 완간에 맞춰 귀국한 그는 기자간담회에서 촛불집회의 본질은 위대하나 한편으로는 끔찍한 디지털 포퓰리즘의 승리라고 말했다. 기사는 연합뉴스를 참조했다.


소설가 이외수는 예술과 이명박 정부에 주목했는데, 예술이 진보에 기여할 때라고 주장했으며, 촛불집회를 색깔론과 배후조종설 따위로 가리려는 이명박 정부와 친 이명박 인사들을 묶어 콘크리안(뇌가 콘크리트화된 인간)이라고 비난했다. 6월 3일 한겨레와 프레시안에 기사가 실렸다.


김지하 시인은 6월 10일 경향신문에 게재한 칼럼을 통해 이명박 정부가 복잡다단한 현실과 속도감과 집단지성으로 무장한 네티즌에 대해서 너무 단순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촛불집회 참여자들이 인류의 민주주의 방향을 고민하는 신인류라고 찬사를 보냈다.


현장에서 종이의 뜰채로 갓 건져올린 낱말들


촛불집회의 5월과 6월은 온도 정도가 아니라 공기 자체가 다르다. 5월 31일 강경진압을 전후로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와 진을 차렸고 변화를 외치기 시작했다. 중고등학생에서 시민으로 주체가 바뀐 것도 그 시점이다. 소설가 김연수는 때 아닌 초여름에 야누아리우스(Januarius : 야누스 신의 달)와 조우했다. 5월의 오후에 가족끼리 옹기종기 모여앉아 소풍 같은 집회를 즐기는 모습에서 느껴지던 따뜻함은 살수포로 급랭하였고, 김연수는 극적인 반전의 트라우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듯했다. 그를 구출해준 것은 진압경찰에 맞서 끝까지 인내심을 발휘하며 비폭력을 유지했던 친구들이었다. 친구들에 대한 감사와 함께 6월의 대단원을 예고하였다. 안도와 혼란이 뒤섞인 어지러운 문장 안에는 송곳같은 전운(戰雲)이 감춰져 있었다.
신현림 시인은 다른 의미의 따뜻함을 소회했다. 그것은 질박하고 살가운 생명의 내음이었다. 시인에게 생명이란 질척거리는 성질이다. 온갖 모순과 욕망이 뒤섞여 있으면서 경이롭고 위대한 성질이 빛나는 것이 인간 생명체다. 그는 "세상 끝에 서 있는 절망감과 생생히 살아있다는 존재감 사이에서 강물처럼 흘러가는 행렬. 이렇게 모두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을 듯한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생명은 15년 전 보길도에서 서럽게 울었던 누렁소로 옮겨간다. 고깃덩어리가 아니라 생명덩어리인 소. 광우병 이후로 많은 소들이 태워졌다는 사실을 환기하며, 장작을 태우는 것과 소를 태우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각인시켰다. 그러면서 마지막 사자후를 내뱉는다. "소가 미치면 사람도 미치는 거야, 나무가 죽으면 산이 죽고, 물고기가 죽으면 바다가 죽는 거야, 라고! 연기 같은 탄식을 던지면서..."
오랫동안 '생명'을 화두로 삼았던 김지하는 촛불시위의 운동방향을 '생명을 섬기는 문화혁신'으로 규정했다. 한국문화 전체가 '생명'과 '평화'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문재 시인은 이 생명이 머무를 수 있는 토대, 즉 공간과 시간을 가지고 따뜻한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그에게 공간은 권력과 규제의 상징인 아스팔트였으며, 시간은 10대 여학생의 빼앗긴 미래로 대변된다. 법과 질서로 압축된 공적 공간이며 보행자에게 금지된 장소인 거리는 축제의 광장으로 역전된다. 기성의 경계가 완벽히 허물어지고 대신 그 자리에 사람과 사람이 몸을 맞대고 행진하는 축제의 장이 생긴 것이다. 시간은 10대 소녀가 번쩍 들어올린 피켓에 모두 담겨 있었다. "대학에 가고 싶다, 결혼하고 싶다, 꿈을 이루고 싶다" 자신들의 미래가 대통령, 정치인, 기성세대에 의해 강탈당하고 있음을 깨닫는 일성이다. 비단 소녀뿐이랴. 대한민국인의 미래는 불안이라는 짙은 구름에 갇혀 있고, 2단 짜리 컨테이너 장벽에 막혀 있는 상태다. 그는 촘스키를 인용할 뿐이었다. "당신이 변화의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면 당신은 정말 변화가 없는 현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소설가 김남일에게는 8~90년대와 2008년에 새로 만난 동지들이 서로 교차됐다. "저토록 해맑고 예쁜 여중생 동지들, 어디에서 저토록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나오는 걸까" 그는 자신의 동지들을 소개한다. 학원 빼먹고 PC방 갔다가 거리로 나온 여중생 동지, '뇌'에 아직 세상이라는 '개념'이 형성조차 되지 않은 유모차 동지들과 함께 행진하는 것이 황황하기 그지없지만 낯설지는 않다. 그가 믿고 의지할, 그리고 소중한 것을 함께 지켜나갈 동지들이기 때문이다.
소설가 방현석은 촛불집회에서 두 개의 상상력이 충돌하는 것을 목격했다. 컨테이너로 대변되는 70년대의 상상력과 소통와 속도로 무장한 2008년의 상상력이다. 2008년의 상상력은 컨테이너를 넘지 못했다가 아니라 넘지 않았다이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넘을 필요가 없다. 이미 넘어섰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신인류의 상상력이다.


촛불의 원 밖에서 펼쳐진 올드보이의 리턴매치

그에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촛불보다 차가웠다" 불이라는 것이 뜨거움을 상징하므로 '차갑다'는 말과 어울리지 않는 용어반복일 수 있다. 완간 서적에 대한 홍보의 자리이기도 했고, 원체 이 문제에 대해서 신중한 입장을 유지하려 했다. 그래서 진의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촛불을 양면적으로 해석했다. '위대한 디지털 포퓰리즘의 승리'는 "촛불보다 차가웠다"는 말보다 묘한 풍경이 느껴진다. 포퓰리즘이 위대할 건 또 뭔가? 분노의 힘을 초농축하여 광장에 집결했으니 그 자체는 위대하지만, 그것이 습관병이 될 것이 끔찍하다는 말일까? 이런 댓글 하나 달고 가는 게 좋을 듯하다. "위대한 힘은 끔찍하게 변할 수 없다"
이외수 작가는 다혈질인가 보다. 이명박 정부에 화가 많이 났다. 심지어 "아가리가 백 개라도 잘못된 건 잘못된 거고 무식한 것은 무식한 것"이라며 "이제 그만 닥치시라"고까지 했다. 그보다는 촛불집회에 관한 그의 인상을 스케치해두는 게 좋겠다. '진흙 속 저 연꽃 곱기도 하지'라는 시어로 인상을 대신 전했다. 스스로 양심을 간직한 맑은 연꽃이다. 국민들이 경제라는 환각에 한 동안 취해 있었지만, 이제는 양심과 도덕을 다시 찾으려 한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이명박 정부의 저열함이 너무 심각해 걱정이 되긴 하지만, 이것을 꼭 알아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김지하의 칼럼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전두환 전 대통령 다음으로 교양이 없는 대통령이 아닐까 생각한다. 전 씨는 대통령 시절 어느 행사에 가서 방명록에 이런 말은 남겼다. "自身感!" 사전에 없는 말이다. 아마 "自信感"을 쓰려다가 잘못 쓴 것 같다. 이명박 대통령도 친필에 수많은 오탈자를 남기기로 유명했다. 김지하가 이런 사연을 알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보수적인 데다가 철학적으로 준비가 안 돼 있고, 학문적으로 모자란 어중이떠중이에다가 결정적으로 당면 문제를 풀어갈 도덕성과 능력이 부족하다"고 이명박 정부에 대해 혹평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공권력이 시민들을 제압한 듯하지만, 이것은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라고 말했다. 촛불시위 참여자들은 사위에서 나타난 문화적 폭발을 통해 잠재된 문제의식을 깨달으며 매일매일 성숙해지고 있는데, 이에 맞서는 이명박 정부는 벌써 30년 전으로 되돌아가버렸다는 것이다. 갑자기 도스또옙스끼의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이 떠오른다. 몰락한 귀족 출신인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와 말단 공무원 마까르 알렉세예비치의 문화적 간극. 그들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아니라, 바르바라에게는 애초부터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도 마까르에게는 순정이라도 있었지.
이명박 대통령이여. 우리 벌써 100일 됐다. 헤어지면 안 되겠니~ 너무 수준차이나서 못살겠다!!


★ 작가들의 기사 출처(링크)

[시사IN 39호] 이문재, 세종로 한복판 ‘강한 민주주의’의 불씨를 보았다
[한겨레] 김연수, 물대포에 찢겨진 5월 마지막 ‘햇살’
[경향신문] 신현림, “오죽했으면 이 깊은 밤에 애 둘러업고 나왔을까”
[경향신문] [한국작가회의 ‘촛불 집회’ 릴레이기고](1)김남일
[한국작가회의 ‘촛불 집회’ 릴레이기고](2)방현석
[연합뉴스] 이문열 "촛불집회는 디지털 포퓰리즘의 승리"
[한겨레] 이외수, “낚시 달인? 배스와 쏘가리 구분도 못해”
[프레시안] 이외수 "빌어먹을 배후설, 아직도 '콘크리안' 많아"
[서울신문] 김지하, “촛불시위는 4·19와 마찬가지”
[경향신문] 김지하 시인, 생명 섬기는 문화혁신 설득아닌 토론을 하라

출처 : 비평고원(Critical Plateau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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