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베를린

악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태도 : 도덕화와 심리화

김남시 2007. 1. 2. 22:07

 

세상의 악한 일들을 바라보는 데는 크게 두가지 태도가 있다. 하나는 도덕화의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분석과 심리화의 태도다. 이 중 더 뿌리깊은 건 세상의 모든 일들을 도덕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태도다. 이 태도는 모든 악한 일들의 배후엔 탐욕과 시기, 증오를 가진 악인이 자리잡고 있다고 믿는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범죄들은 그런 악한 의지를 가진 악인들에 의한 것이며, 이는 그들을 사회에서 추방하거나 제거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 힘겨운 싸움을 거쳐 악을 물리치는 선과 정의의 이야기를 담은 동화나 헐리우드 영화들이 이런 태도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 분석화, 심리화의 태도는 사회적 사건과 범죄들을 그를 일으킨 개인들의 악한 의지보다는 그들을 그 행동으로 이끌었던 환경요인을 통해 설명한다. 여기서 개인은 사회, 정치, 문화적 환경의 영향을 받는 상황적 주체로, 그가 일으킨 비사회적 행동은 이 환경들이 그의 심리기제에 작용해 일어난 것으로 이해된다.

 

독일은 그 어디보다 분석과 심리화의 경향이 강한 사회다. 사건이나 범죄가 일어났을때 이들은 그를 일으킨 개인을 도덕적으로 비난하기에 앞서, 그것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분석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를통해, 파리 주변도시에서 폭동을 일으킨 젊은이들은 악한 의지를 지닌 도덕적 지탄의 대상이 아니라 아무 삶의 전망도 갖지 못한 채 피폐한 도시에 갇혀있던 환경의 피해자로 등장한다. 엽기적 살인행각을 벌인 범인은 도덕적으로 비난받기 전에 심리적으로 병이 든 환자로 여겨져 감형을 받기도 한다. 교통사고로 사람을 죽게한 운전자를 경솔하다고 지탄하기보다는, 그 사고를 통해 심리적 충격을 받은 피해자로 여겨 심리 치료사의 진료를 받게한다. 

 

이러한 심리화 경향의 원인은 무엇보다 독일사회가 도덕화가 갖는 전체주의적 위험을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혁명기 중국에서 반동분자라는 도덕적 비난이 어떻게 개인에 대한 집단적 폭력을 정당화했었는지, 나찌시절 반유대주의가 어떻게 유대인에 대한 도덕적 비난과 결합되어 있었는지 생각해보면 도덕화가 가진 전체주의적 위험성이 분명해진다.

 

이는 또한 독일 사회가 도덕화의 태도가 지닌 비현실성을 절감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십만의 유대인을 학살한 거대한 악이 실지로 일어났건만, 정작 현실에 존재했던 건 유대인을 몰살시키려던 악한 의지가 아니라 다만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던 시민들 뿐이었다는 것을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유대인 학살은 몇몇 악인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독일과 독일인들이 처해 있었던 사회, 정치, 문화, 역사적 조건들의 무의지적 합작물이었던 것이다.

 

이 세상의 악한 일들이 이처럼 몇몇 악인들의 의지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어떤 악한 의지가 없어도 특정한 조건들하에서 언제라도 생길 수 있는 것이라면, 중요한 것은 사건이나 범죄를 일으킨 사람의 악한 의지를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발생케 했던 조건들을 분석해 그것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조처하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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