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뒤늦게 "미생"에 대해 생각한 것

김남시 2014. 4. 6. 23:46


오늘날 노동의 영역은 노동하지 않는 여가 혹은 ‘일하지 않는 시간’을 남겨놓지 않을 정도로 삶의 시간 전체로 확장되었다. 의미있는 삶의 에너지이건,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꿈꾸는 시간이건, 어쨌든 그러한 가능한 영역을 그 ‘노동의 바깥’에, 예를들어 “자유로운 생활, 일하지 않는 시간, 반노동의 시간”(마술적 마르크스 주의, 54쪽)에 위치시키는 것, 그곳에서의 ‘놀이’, ‘마술’, ‘상상력’에 위치시키는 전략은 그러한 점에서 근본적으로 무기력하다. 예를 들어 <마술적 마르크스주의>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놀이 요소를 상실하는 것은 우리의 일부를 상실하는 것이고, 우리 자신을 어느 정도 제한하는 것이며, 우리의 상상력을 축소하는 것이고, 마술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것이고, 놀이의 범위를 제한하는 일이다.”(56)

하지만, 오늘날 노동의 양상이 노동하지 않는 자유로운 시간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어쩔 것인가? 일하는 시간이 삶이 시간 그 자체와 너무도 치밀하게, 미시적으로 융합되어 버려 저 ‘상상력’과 ‘마술’이 벌어지는 영역, 시간을 찾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 ‘노동하지 않는 시간’을 확보하려는 사회, 정치적 시도들이 처절하게 실패한 나머지 사람들은 이제 온전하게 일하는 시간, 노동에 포섭되어 버렸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방법은?

<미생>은 정확히 이 지점에 위치한다. 그 만화가 다루는 대상인, 대기업의 회사원은 의미심장하다. 무엇보다 그들은 전통적인 좌파, 마르크스주의적 계급론에서 온전한 독자적인 자신의 지위를 얻지 못한, 그래서 생산하는 노동자 계급도, 지배하는 부르주아도 아닌 애매한, 중간자적인, 그래서 기회주의적이기도 한 그런 계층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들에게 어떤 ‘혁명적’ 역할을 부여하려는 시도들은 또한 이들의 삶이 갖는 개인주의적, 소부르주아적 기반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스스로 이런 회사원의 삶을 살면서, 또한 좌파적, 변혁적 지향을 갖는 사람들은 자신이 속해있는 이 ‘정치적으로 의심스러운’ 위치를 의식하며, 자기 분열되어 있다.

이들의 노동은, 퇴근시간이 없는, 이들의 노동방식은 이들로 하여금 그 ‘일’ 안에서, 그 노동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지 못하면 견디기 힘들게 하는 근본조건으로 작용한다. 사무노동이 ‘소외’된 것이라면, 세상의 재화를 생산해내지도 못하고, 소위 ‘지식노동’으로서의 보다 고급스러운 지위도 향유하지 못한 채, ‘월급쟁이’라는 경멸적인 언어로 지칭되어온 이러한 지위 속에서 아무런 그를 넘어서는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이들의 삶은 견디기 힘들어질 것이다. <미생>은 바로 그들의 ‘일’ 속에, 그들이 행하는 일, 그를 위한 사회적 관계, 거기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인생의 의미”에 의해 점유되어 있음을, 그것들이 지긋지긋하고, 인간을 소외시키거나 혹은 착취당하는 시간이 아니라, 바로 그 시간 속에서, 오늘날 현대인들이 찾기를 갈망하나 좀처럼 찾기 어려운 “삶의 의미”가 농축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 만화가 수많은 대한민국의 회사원들, 직장인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것은 수적으로도 노동인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이 회사원들의 주눅든 자의식에, 당신들이 하고 있는 일에 최고의 진지함이라는 ‘삶의 의미’가 편재되어 있다고 말해줌으로써, 그를 고양시켜준다.

이러한 점에서 미생은 루카치가 ‘소설’에 부여하였던 역할을 변화된 시대적 조건 속에서 행한다. 벤야민의 해석에 따르면 소설은 “속수무책 Ratlosigkeit’가 보편화된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이 ”삶의 의미 Sinn des Lebens“를 찾기 위해, 그 삶의 의미를 예감하면서, 소설을 읽는 독자들을 위무했던 것처럼. ‘이야기’의 소멸을 대신해 등장한 ‘소설’과 관련해 벤야민이 분석했듯이, <미생>에 대한 사람들, 특히 회사원들의 폭발적 반응은 이러한 전제를 공유한다. 곧, ”속수무책“이라는 삶의 상황. 더구나 여가와 노동시간의 구분조차 해소시켜 버린 신자유주의적 노동 조건 속에서, 자신의 왕성한 삶의 시간을 온전히 업무와 일에 바쳐야 하는 상황 속에서 어떤 ”삶의 의미“를 갈구하고 있던 사람들의 상황, 그것이 출발점이다.

루카치가 지적했듯 소설, 소설의 내적인 행위 전체는 “시간의 힘에 대한 투쟁”에 다름 아니다. 바로 그 싸움으로부터 서사적인 시간체험이 등장한다. 희망과 기억. “소설에서만 창조적이고 대상에 적확하고 그 대상을 변화시키는 기억이 등장한다. 자신의 삶 전체의 통일성을 회상 속에 함께 채워진, 지나간 삶의 흐름으로부터 바라볼 때에만 내면성과 외적세계의 이중성은 주체에게 ‘지양’될 수 있다. 이러한 통일성을 포착하는 통찰은, 도달되지 않은 그래서 말로 표명할 수 없는 삶의 의미에 대한 예감하면서-직관적인 포착이다.” (이야기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