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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헤어스타일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김남시 2014. 3. 17. 00:48


우리는 매일 일상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있지만, 생각해보면 사람들 사이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또 그에 근거해 사회 시스템이 움직여가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도대체 소통이 작동한다는 것 자체는 원리적으로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니클라스 루만 같은 이론가의 소통 이론이, 역설적이게도, 소통의 비개연성 Unwahrscheinlichkeit 에서 출발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소통은 원리적으로 제대로 작동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다. 첫째 서로 분리되어 있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개인들이 도대체 상대가 하는 말을 이해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렇다. 그 말을 하는 자의 의식과 기억 속에서만 완전하게 이해될 수 있는 누군가의 메시지가 그와는 분리된 의식을 가지고 있는 타자에 의해 이해된다는 것은 원리적으로 비개연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메시자가 수신자에게 도달할 가능성 역시 비개연적이다. 누군가의 메시자가 시간적, 공간적으로 규정된 구체적 상황 속의 사람들을 넘어, 그와는 다른 시, 공간적 맥락에 위치한 수신자에게까지 전달되고 도달한다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번째로 위 두 비 개연성이 극복되었다 하더라도, 다시말해 누군가의 메시지가 발신자의 맥락을 넘어 수신자에게 도달하고 또 그에 의해 이해되었다 하더라도, 수신자가 그 메시지를 수용함으로써 소통이 성공할 가능성도 매우 비개연적이다. 발신자의 메시지를 이해한 수신자는 그를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Niklas Luhmann : Die Unwahrscheinlichkeit der Kommunikation, in Aufsätze und Reden, Reclam, 78‐79)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소통 규칙들과 소통을 위한 매체들, 나아가 그를 통해 구성되는 사회적 체계는 이러한 소통의 비개연성을 최소화시키려는 동기에서 생겨난다. 예를들어, 식당과 레스토랑에 이미 메뉴가 정해져 있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음식의 종류를 처음부터 설명해야할 수고를 크게 덜어주는, 제도화된 소통의 규칙이다. 난 “나와 분리된 의식을 가진” 누군가에게 내가 원하는 음식의 종류와 맛을 일일이 설명하고 소통시키는, 그 성공이 비개연적인 활동을 벌이는 대신 이미 마련되어 있는 메뉴를 골라 주문만 하면 된다. 병원을 찾아갔을 때 작성하는 문진표는, 그렇지 않았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는 정보전달 - 과거 자신의 병력 들 – 의 절차를 간소화시켜준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런 소통의 비개연성을 극복해줄 만한 소통의 규칙이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않은 분야가 있으니, 미장원 혹은 이발소다. 미장원이나 이발소는 머리를 깍기 위해 가는 곳이다. 그렇기에 그 곳에 들어가면서 나는, 무엇을 위해, 왜 여기에 왔는가를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고, 그 곳 사람들 역시 내게 그를 묻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통의 첫 번째 비개연성을 완화시켜주기는 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 다음부터 생겨난다. 내가 원하는 헤어 스타일을 내 머리를 깍아주려는, 나와는 “분리된 의식을 가진” 이에게 도대체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경험상, 내가 가진 몇 가지 궁핍한 단어들 - ‘너무 짧지 않게’, ‘스포츠로’, ‘앞머리는 남겨두고’, ‘귀가 나오게’ 등등 – 은, 나의 요구와 최종결과 사이의 간극이 지나치게 크지 않도록, 그래서 변한 내 모습에 내 스스로 경악하지는 않을 정도만 날 소통시킬 수 있을 뿐이다. 더구나 이 엄밀하지 못한 단어들이, 과연 내가 그를 사용할 때 떠올리는 동일한 표상을 미용사나 이발사 아저씨에게 떠올리게 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설사 그것이 성공했다 하더라도, 미용사나 이발사 아저씨의 손이 그 표상을, 구체적인 나의 머리통 위에서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을지 아닐지는 별개의 문제다. 사정이 이러하니, 지금까지 이 단어들만으로 내가 원하는 ‘바로 그’ 헤어 스타일을 현실화시켜 본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나는 머리를 깎을 때 이와는 다른 전략을 취한다. 나의, 제대로 표현되지 못한, 올바로 소통되지 못한, 그렇게 되었는지 아닌지의 확인조차도 불가능한, 나의 선호를 표명하는 대신 “알아서 깍아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