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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푸리에와 인간에 대한 ‘과학적’ 이해

김남시 2014. 3. 17. 00:42


푸리에는 ‘유토피아’를 꿈꾼다. 당대 부르주아 계급 출신의 이 진지한 지식인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가 높은 기술과 문명의 단계에 도달했다는 사실에 자족하지 않는다. 그는 현재 인류가 도달한 문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빈곤, 노동착취, 만연한 사기협잡, 도적질, 상업독점, 노예유괴’ 등의 재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여전히 많은 재앙과 불행이 지배적이라는 사실을 관찰한다. 루소 같은 사람들은 이로부터 자연 상태의 평화와 행복을 파괴시키고 등장한 문명과 기술 자체의 부정성을 도출해내고, 도덕주의자들은 인간 심성의 타락을 한탄하겠지만, 푸리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이 사회적 문제에 대해 도덕적으로 혹은 이상주의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그는 현재의 사회적 질서 속에서 이런 ‘문제’들을 일으키는 원인을 찾고, 그를 ‘해결’하려는, 19세기 과학자의 시선과 태도를 가졌다. 그로부터 그는 현재 도달한 “문명의 영속성을 의심”하면서, 현재의 문명이, “가장 훌륭한 사회적 질서에 의해 대체”되어야 할 “하나의 단계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계몽주의자들이 그 필요성과 탁월함을 역설하던 현재의 문명과 사회적 질서 속에서 그 개선의 가능성을 본다.

그는, 그 새로운 사회질서의 배후에 어떤 당위를 설정하지 않는다. 그 새로운 사회질서는, 도덕적이고 의무에 찬 사람들의 정치, 사회적 노력과 운동을 통해 비로소 얻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마치 불편한 기계를 더 잘 움직이게 만들 듯, 그렇게 바꾸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가 보기에, 그가 발견한 새로운 사회질서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 뿐이다. 그를 위해 사람들에게 어떤 분노나 부정의에 대한 폭로, 그를 바꾸려고 하는 의지를 불러낼 필요도 없다. 이러한 그의 관점은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의 “열정적 인력에 대한 이론”은 인간에게 존재하는 810가지의 열정을 적절하게 조직하고 조합함으로써, 인간의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열정’을 “화합의 적이라고 믿고”, ‘조화’를 위해서는 억눌러야 한다고 것이라고 여겼다면, 푸리에는 그러한 “열정을 억누를 수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그는 인간의 “열정의 본질을 변화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열정의 단계를 변화”(35)시킴으로써 인간의 행위를 바꿀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만약 재산을 갖고 있지 않으며 결혼을 혐오하는 남자에게 10만 리브르의 연금을 지참금으로 가져올 한 여성을 소개한다면 그는 전날까지도 질색했던 결혼에 즐거운 마음으로 동의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가 자신이 지닌 열정을 변화시켜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하지만 그가 지닌 열정 중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부유함에 대한 사랑은 그 단계가 바뀔 것이다. 부유함에 대한 사랑이라는 열정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어제까지 마음을 언짢게 했던 수단을 취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이루려는 열정은 그 본질이 변화하는 것은 아니며 단지 목표에 이르는 과정만이 변화한다.”(35-36)

푸리에는 사람들에게 어떤 열정을 억누르고, 당위나 도덕적 이상을 따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존재하는, 결코 억누를수 없는 열정의 단계를 변화시킴으로써, 그의 행동을 변화시키려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비난할 위의 사례에서 푸리에는 단지, 인간에게 존재하는 810가지의 열정의 단계의 변화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