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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은 내면에 있는가?

김남시 2014. 3. 17. 00:37


황현상 선생의 책 <밤이 선생이다> 중

“국립박물관의 고려청자 전시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한 무리의 중학생과 인솔 교사가 들어왔다. 그때 나는 놀라운 말을 들었다. ‘이 도자기들은 고려의 도공들이 억압 속에서 노예적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아무 가치가 없으며, 차라리 증오해야 할 물건들’이라고 그 젊은 교사가 학생들에게 단언했던 것이다. 도공들이 뼈저린 고통 속에 살았다는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그들의 신분은 비천했으며 그들의 작업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제 손목을 자르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비록 노예라고 하더라도, 한 사람이 이룩한 작업의 가치를 그 생산제도의 성격으로만 따질 수 있을까. 도공들이 그 아름다운 그릇들을 억압과 고통 속에서, 원한과 분노 속에서 만들었지만, 도공들은 또한 그 도자기를 통해 자기 재능을 실현하고, 자기가 살고 싶은 세계에 대해 그 나름의 개념을 얻기도 했을 것이다. 그 소망이 없었다면 도공들은 그 아름다움을 어디서 끌어왔겠는가. 그리고 그 소망은 우리의 소망이 아닐 것인가. 교사는 도공들의 편에 서서 말한 것이 아니라 도공들을 모욕한 것이다.”

현재의 구조와 시스템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바로 그 안에서 행하고 있는, 어쩌면 행해야 하는 일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들이 그 구조 안에 침윤되어 있기에, 물들어 있기에 그들의 시간은 오롯이 소외된 시간일까? 그들이 그 시간의 ‘바깥’을 찾지 못하기에, 아니 그 시간이 있더라도 그를, 결국 시스템의 찌꺼기들을 소비하며 살아가고 있기에, 그들을 포기하는 것이 옳을까? 그 ‘그들’은 결국 우리 자신이기도 한데, 강한 의지로, 실패와 망함을 두려워하지 않는 결단으로, 이 곳의 ‘바깥’을 나가지 못한 사람들은, 그렇게 버려두는 것이 옳은가?

황현상 선생은, 그것이 어떤 일이든, 그를 행할 때의 ‘소망’, 그를 행하는 사람의 내적인 ‘진정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몽유도원도’를 줄 서서 단 2분 동안 보기 위해 두 시간 내지 여섯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에 대해, 그럼에도 그들이 “낡은 그림 한 점을 보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렸던 그 긴 시간을 스스로 대견하게들 여기고” 있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반드시 몽유도원도가 아니라 해도 위대한 어떤 것에 존경을 바치려했으며, 이 삶보다 더 나은 삶이 있다고 믿고 싶어했다. 저마다 자기들이 서 있는 자리보다 조금 앞선 자리에 특별하게 가치있는 어떤 것이 있기를 바랐고, 자신의 끈기로 그것을 증명했다. 특별한 것은 사실 그 끈기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두텁고 불투명한 일상과 비루한 삶의 시간을 헤치고 저마다의 믿음으로 만들어낸 일종의 전리품이기 때문이다. 아흐레 동안 국립중앙박물관의 광장에 구절양장을 그린 긴 행렬은 이 삶을 다른 삶과 연결시키려는 사람들의 끈질긴 시위였다.”

그는 “저마다 자기들이 서 있는 자리”에 서서 이 삶을 ‘다른 삶’과 연결시키려는 소망, ‘자기가 살고 싶은 세계’에 대한 소망을 갖는 것, 그것의 가치를 인정한다. 그 '소망'은 객관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보수적일 수도 있고, 어쩌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것일수도 있다.

"진정성"을 개인이 갖는 내면성에서 찾는 것. 주관적 진정성 체계라고 부를 만한 이러한 태도는, 꽤나 깊숙히, 우리의 문화 속에, 또 내 속에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