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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시 2009. 11. 15. 10:36

출처 : http://www.mediamob.co.kr/sanha88/Blog.aspx?ID=242143

 

 

비겁하지 말자

썸데이서울 | 2009-11-12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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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저녀' 사건으로 세상이 좀 시끄러웠다.   키도 경쟁력인 세상에 180 이하의 남자들은 '루저'라고 생각한다는 한 여대생의 발언은 2009년 현재 20대 평균 신장조차 175센티 이하에 머물고 있는 대한민국 남성들을 격노시키기에 충분했다.  나 자신 180은 커녕 170 고개에 바둥바둥 턱걸이하고 있는, 현격한 '루저'로서 심히 안녕치 못하다.    


 오늘 그녀가 올린 사과문을 읽었다.  그 이름도 끔찍한 네티즌 수사대에 의해 과거의 가방 수선 경력부터 오늘의 일거수일투족까지 만천하에 공개되어 버린 젊은 여성의 공포와 당혹감이 스며나왔지만 그래도 "말조심해야지 그러니까....."하는 루저로서의 복수심을 버리지는 못하고 있었음을 고백해 둔다.  하지만 읽다 보니 걸리적거리는 대목이 있었다. 
   

  "작가들에게서 받은 앙케이트에 O, X 형식으로 짧은 답을 하게 됐고 그것을 참고해 만들어진 대본을 가지고 11월1일 녹화를 했다"고 한다.  모르긴 해도 문제의 '루저녀'가 키 작은 남자들에 관심을 갖지 않음은 앙케이트를 통해 드러났을 것이다.  이 현격한 루저가 볼 때 매우 불쾌하고 비합리적이며 바보같은 발상이긴 하지만 어쩌랴 그것은 그녀의 자유의지일 뿐이다.  하지만 그 생각을 공개된 장소에 끌어낸 것은 앙케이트였다.  아마 키 작은 남자는 남자로 안보인다  정도의 앙케이트 문항이 있었을 것이고 당연히 루저녀는 O에 응했으리라.   그런데 그  O가 '루저'라는 , 예리하고 뾰족하여 사나이 가슴에 박혀서 돌아오지 않는 화살같은 단어로 승화된 것은 분명 다음과 같은 상황이 지대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제일 논란이 많이 되고 있는 '루저'라는 단어는 작가 측에서 대사를 만들어 대본에 써 준 것이며,  대본을 강제적으로 따라야 할 의무는 없었지만 방송이 처음이었던 저와 같이 나왔던 여대생들에게는 너무나 긴장한 나머지 대본이 많은 도움이 됐고 대본을 따르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그래서 낯선 성황에서 경황없이 대본대로 말하게 됐다."

 
  루저라는 표현의 지적소유권이 제작진에게 있다는 말이다.   물론 루저녀 스스로 인정하다시피 '스물 두살의 자유의지와 사리판단 능력을 갖춘' 여대생이 그 대본을 무비판적으로 따른 것은 잘못이라 하자.  하지만 일반인들과 함께 스튜디오 녹화를 해 본 사람으로서 나는 이 사태의 책임은 그녀보다는 제작진에게 더 크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통 일반인 출연자는 평생 조명 아래에 처음 서는 사람들이다.   그 조명이 얼마나 뜨거운지도 모르고, 자신의 주위는 대낮같지만 한 치 앞은 어둠인 기묘한 상황에 처음으로 직면하는 사람들이다.   리허설 때 자신이 하고자 했던 말과 하라고 주문받은 말의 경계가 어느 새 뒤죽박죽이 되고, 옆에서 묻는 말조차 잘 들리지 않기도 한다.  무슨 말을 빼먹을라치면 앞에 선 작가와 조연출이 스케치북에 큼직하게 써서 펄펄 뛰며 피켓팅을 하고 있다.  


 그 스케치북에 "루저! 루저!"라고 쓰여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 쓰여 있지 않았다고 해도, 리허설과 사전 미팅을 통해 이미 두 번 세 번 주의를 환기받은 이들로서 실수가 아닌 주관적 의지로 대본을 무시하는 일반인 출연자는 그렇게 많지 않다.  즉 저 맹랑한 단어 '루저'는 루저녀의 발언이 아니라 웃음과 황당함을 유발하고,  "내가 능력있으면 되지 않아? 그렇게 자신없어?"라고 강하게 나오는 크리스티나와 대비되는 모습을 연출하려는 의도에서 산출된 단어였다고 나는 판단한다.  '루저' 운운이 제작진의 의도를 벗어난 돌발발언이었다면 절대로 방송을 타지 못했을 것이다.  PD들 그렇게 허술하게 방송하지 않는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제작진의 해명이었다.  제작진의 녹화와 편집을 거친 방송에서 한 '민간인'이 방송상 제기된 실언으로 말미암아 공인된 동네북이 되는 판에 "대본은 토론 진행상 참고 자료로 쓰일 뿐, 강요되는 것은 아니다"고 발을 빼는 모습은 매우 아름답지 못했다.    아무리 야생을 찾고 생생을 달고 사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대본은 존재하고, 그것은 제작진의 연출 의도를 반영하며 출연자에게 모범답안으로 제시된다.   "꼭 이대로 하시라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취지로..... 아셨죠?"  이 요구를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강요는 아니라 하지만 참고(?)는 더더욱 아니지 않나?  (물론 '미수다'의 녹화만은 특수하게 진행된다고 강변한다면 할 말은 없다.)    


  '외모지상주의를 부추길 의사가 없었다'는 제작진의 해명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아무렴 공영방송의 프로그램에서 그럴 의사를 가지고 프로그램 만드는 인사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외모지상주의의 슬로건 같은 희한한 대사가 녹화때 NG 나지도 않고 편집 때 걸러지지도 않은 채 방송에 나갔다는 사실 아닌가.   루저녀에 대한 마녀사냥을 걱정하는 마음씨는 칭찬할 만하지만,  우리가 마녀를 만들었습니다 하는 반성이 앞서야 할 일이었다.  외모지상주의를 부추길 의사가 없었다는 변명보다는 외모지상주의에 제작진 스스로 둔감했다는 반성이 더 절실한 상황이었다.    


 
 제작진의 소심함(?)만 탓하려고 끄적이기 시작한 게 아닌데 너무 길어졌다.  주지하다시피 루저녀의 사생활은 이미 융단폭격을 받았고 소속 학교까지도 싸잡아 욕을 먹고 있으며, 개념없는 외모지상주의적 발언에 대한 댓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거기에 미수다 폐지 서명 운동도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런저런 뉴스를 들으면서 내 머리에 치미는 단어 하나는 비겁함이었다.  비겁하다.  정말로 비겁하다.   더군다나 그 폭격과 욕설과 폐지 운동의 이유가 "개념없는 외모지상주의 발언의 공개적 천명"이라면 비겁함을 넘어서 야비하기까지 하다. 


  못생긴 여자 앞에서 구역질을 하는 코미디에 대해서,  어떻게 그런 다리로 치마 입고 다니냐는 농담에 대해서, 얼굴이 무기니 견적이 얼마니 하는 못생긴 여자는 게으른 여자니 하는 발언에 대해서 항의하고 분노했던 기억이 있는가.  그런 발언의 당사자가 융단 폭격을 맞고, 사생활이 낱낱이 파헤쳐지며, 그 여성 편력들이 처절하게 공개된 적 있는가. 그런 멘트들을 부주의하게 노출시킨 프로그램을 폐지하라는 서명 운동이 불길처럼 일어난 예가 혹시 있었던가?   이미 외모지상주의가 쉬가 슬도록 깊숙히 뿌리내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굳건해진 지 옛날인 나라에서 이게 웬 소란인가 말이다.   온 세상 천지가 S라인 V라인을 외치고,  못생긴 것은 죄라는 언설이 서슴없이 운위되는 방송판에서  "180 이하 남자는 영 아니에요." 정도의 말이 어떻게 하늘을 뒤집고 지축을 흔드는 망언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인가.


  "살찐 여자는 루저예요."라고 한 남자가 말했을 때 그 남자가 루저녀의 전철을 밟게 된다면,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그렇게 형성된다면 나는 루저녀에 대한 네티즌 수사대에 기꺼이 가담할 용의가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지금 벌어지는 작태는 수컷들의 쓸데없는 '곧추세우기'에 불과하다고 본다.    물론 나조차 그로부터 초연하다는 오만 따위는 부리지 않을 생각이다.   비겁하지는 말자.  손쉬운 흥분은 비겁의 도피처다.   

 
 일일일문 완성...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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