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베를린

(2008년 4월 17일) 수술, 언어, Abendbrot

김남시 2008. 4. 17. 18:26

 1.

 

수술은 나의 육체를 절개하고, 드러내며, 잘라낼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는 의사에 대한 믿기지 않을 만큼의 신뢰를 전제로한다. 오늘날 우리 인간들 말고는 그 어떤 다른 존재도 자신의 육체를,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대한 본능적 방어조차 억누르면서 이처럼 순순히, 낯선 존재에게, 글자 그대로 온전히 내어 맡기지 않을 것이다. 수술대에 오르는 인간이 의사에게 갖는 이러한 초 본능적 신뢰는 현대 의학 기술에 대한 우리의 맹목적 믿음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거기엔 그 이상의 무엇이 존재한다. 절대적으로 무방비 상태가 된 자신을 어떤 초월적, 신적 존재에게 내어 맡기는 오래된 제스쳐의 흔적이.

 

어쩌면 우리는 그를 수술 手術 이라는 단어의 쓰임 속에서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글자 그대로만 말하자면 -기술, 혹은 -마술이라는 의미에 다름 아닌 이 단어를 우리는 받다라는 단어와 결합해 사용한다. „선물을 받다.“ „벌을 받다“, „영항을 받다„, 나아가 공을 받다등의 문장에서처럼 여기에서는 동사 받다의 목적어가 되는 대상 선물, , 영향, - 이 나보다 물리적 혹은 위계적으로 상위의 곳에서 아래에 있는 나를 향해 내려오는 어떤 움직임이 표현되어 있다. 이는 이 단어가 동사가 아니라 피동의 의미를 드러내는 접미어로 사용될 때에도 유사하다. „거부당하다“, „무시당하다“, „고소당하다에서의 당하다가 나를 거부, 무시, 고소하는 행위 주체와 사이의 어떤 유사한 레벨의 위계적 관계를 전제하며, 그런 점에서 그런 존재로부터 받는 거부, 무시, 고소의 부당함의 느낌이 강조되고 있다면, „사랑받다“, „버림받다“, „무시받다등의 피동 문장에서 그 행위 주체와 나 사이엔 이와는 다른 어떤 위계적 차이가 함축되어 있다. 내가 그로부터 사랑-, 버림-, 무시-, „받을수 있는 주체는 내가 그에 맞서 나 자신을 동등하게 내세우고 주장할 수 있는 상호인정의 관계가 아니다. 그와의 관계에 있어서 난 그에게 감정적 혹은 위계적으로 하위에 처해있다. („친구에게 무시 당하다선생님에게 무시받다.“) „수술 당하다라는 문장이 그것의 강제적 성격만을 드러내고 있는 것과 달리, „수술 받다라는 문장엔 무언가 나보다 우위에 있는 어떤 존재로부터 무언가를 – „손 기술“? - 베풀어 내려 받는다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수술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영어 „to operate“와 독일어 „operieren“ 단어는 모두 라틴어 동사 operari (operor)에서 연유한다. 원래 일하다, 무엇인가에 종사하다의 의미를 갖는 이 단어는, 무엇인가 만들어지고 이루어진 작품을 일컫는 Opus, „최상, 최적을 지칭하는 Optimus등과 같은 잘 알려진 라틴어 단어들과 같은 어근을 갖는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단어가 신에게 제물을 바치다라는 종교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인데, 이로부터 제물을 바치다, 희생시키다라는 의미의 독일어 단어 „opfern“이 연유하기도 하였다. 독일어로 나는 수술을 받았다. Ich wurde operiert“ 라고 말할 때 그 문장 속에는 이러한 어원적 연관성을 통해 나는 희생 제물로 바쳐졌다라는 문장이 함께 울리고 있는 것이다. 외과의사 Surgeon에 해당되는 독일어 단어가 바로 이러한 „operieren을 행하는 자라는 의미의 „Operatuer“라고 표기되는 사실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의미심장하다. 외과 의사에게 자신의 병든 육체를 내어 맡기는 우리의 절대적 무방비 disarmed상태는 이렇게 보자면 자신을 신의 제단에 제물로 바칠 때와 같은 어떤 종교적 봉헌의 태도와 닮아있다.

 

 

2.

 

내가 혼자 어찌할 수 없는 내 뱃속의 통증을 치료받기 위해선 난 내가 한 번도 들여다본 적도 없는 내 육체의 표준성을 나 자신에게, 그리고 증상에 대한 묘사를 통해 외과 의사에게 확신시켜야 한다. 그런데, 내 육체, 나아가 보이지 않는 내장 기관들이 외과 의사의 해부학적 지식의 표준치에 그리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라는, 내 육체의 표준성에 대한 믿음은 자신 존재의 특수성에 대한 낭만화된 숨겨진 열망과 충돌한다. 그 누구도 그 원인을 알아낼 수 없는, 그러나 그것의 일상적 추함과 고통으로부터는 깔끔하게 면제된 신비스러운 병에 걸려, 고고하고도 아름답게 죽어감으로써 자기 존재의 유일무이성을 증거하는 낭만주의적 인물들, 그들이 우리에게 투영시켜 놓은 우리 자신의 개별적 특수성에 대한 동경은 인간 육체의 생리적 표준성과 보편성에 근거하고 있는 임상 의학에 의해 끊임없이 배반당한다.

 

  McBurney-Punkt

 

날 처음 진찰한 의사는 내가 묘사한 배의 통증이 미국 외과의사 Charles McBurney (18451914) 처음으로 체계화해 언급했던 그래서 그의 이름을 찰스 버니 지점이라고 일컫어지는 - 바로 지점들로 지정화 localize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혈액 검사를 통해 혈액 백혈구 수가 정상치를 넘는다(13,5/nl !) 사실로부터 속에 염증이 생겼다는 유추해 내고는 곧바로 수술할 것을 권했다. 모든 객관적 수치와 측정치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 고통을 묘사하는 사적 언어들을 소통 가능한 언어로 번역하면서, 사실상 육체가 과거의 수만, 수백 만의 절개된 육체를 통해 얻어진 표준치에로 완전히 포섭될 있다는 확인해 주었다. 지금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염증이 터지거나 기관들로 번져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 Sie wollen es nicht, oder? - 의사의 위협은 치기 어린 개별성에의 동경이 목욕 까운을 뒤집어 놓은 듯한 수술복과 망측하게 생긴 수술 환자용 스타킹 속으로 숨어들게 했다.

 

3.

 

----- 전신 마취 ------

 

그것은 육체적 감각은 물론 무의식까지 잠시 소등되는 어떤 절대적, 총체적 단절이었을까? 아니면 내 육체는 그 때 자신에게 행해졌던 것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기록 registieren해 놓고 있을까? 내 배에 남아있는 청록색의 실밥과 피 멍들은 그런 감각적 무의식의 흔적인 것일까? 나의 심리적 시스템은 이후 그를 다시 자신의 정보로 포섭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그 시간은 내겐 영원히 잃어버린 시간인 것일까?

 

 

4.

 

독일에서 저녁 식사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단어 „Abend-Brot“ (저녁-)에선, ‚bread and butter’ 라는 단어를 통해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일용 양식 일반을 지칭하는 경우에서 처럼 어떤 메타포나 멋진 환유를 기대해선 안된다. 그건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대부분 독일 가정에서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저녁 식사 때에도 취사를 하지 않고 그냥 빵에 버터 등을 발라 치즈나 햄을 얹어 먹는다. 이들의 이러한 실용적이고도 청교도적인 식 습관을 나는, 베를린에서 출산한 아내가 병원에서 받은 산모용 저녁 식사 메뉴를 통해 이미 확인한 바 있었다. 우린 일말의 모욕감과 정체모를 경탄이 뒤섞인 감정으로 이제 막 아이를 낳은 산모에게도 예외없이 적용되어 나온 „Abend-Brot“ – , , 치즈 !– 을 영접했었다. 독일이 오늘날과 같은 산업 국가로 발전된 것은, 모든 가정, 학교, 병원 나아가 군대 (!)에서 매일 자발적으로 실시되는 이 „Abend-Brot“ 비밀 전략이 그를통해 축적된 거대한 에너지 자원을 자동차와 기계생산에 전용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난 수술직후 내게 배달된„Abend-Brot“을 씹으며 생각했다.

 

 

5.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이들은 두 개의 시민권을 소유하고 있다. 건강한 자들 나라의 시민권, 그리고 아픈 자들 나라의 시민권이다. 우리 모두가 아무리 전자를 선호하더라도 언젠가 우리는, 최소한 잠시 동안만이라도, 저 다른 곳의 시민으로 살도록 강요 받는다.“ (Susan Sontag, Krankheit als Metapher, S.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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